낮아짐이 위대함이다 (마가복음 10:35-45)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핵심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좌우편의 자리를 요청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들의 원했던 것은 단지 천국의 명예로운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
예수님의 좌우편에서 함께 통치하겠다는 정치적 요구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낮아짐이 위대함이다”라는 문구가 생각이 났습니다.
낮아짐이 위대함이라는 말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삶의 방식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복음의 역설, 즉 “낮아지는 것이 어떻게 위대한 것인가?”에 대해 3가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권세가 아니라 섬김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요청한 우편과 좌편은 단순한 자리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통치권을 의미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서 정치적으로 로마로 부터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 자신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이 요청은 당시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그들의 전형적인 야망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의 통치 방식을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에 대해 친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1) “발 씻기”는 가장 천한 종의 역할이었다
고대 유대 사회, 특히 로마 제국 하의 유대 땅에서는 사회적 위계질서가 매우 분명했습니다. 가정 내 종들 사이에서도 역할에 따라 등급이 나뉘었고, 이방인 종 중에서도 가장 하급의 종이 주인의 손님이나 주인의 발을 씻는 일을 맡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샌들이나 맨발로 흙먼지 가득한 길을 다녔기 때문에 발은 가장 더럽고 천한 부위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발을 씻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매우 낮추는 행위였고, 유대인 남성은 아무리 낮은 신분이라도 동족의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2) 명예를 중요시하는 문화에서 발 씻김은 파격적인 자기 비하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명예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즉,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지키는 것이 삶의 핵심 가치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문화 안에서 지도자나 라삐(예수님과 같은 종교 교사)가 제자의 발을 씻는다는 것은 단순한 겸손을 넘어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내려놓는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라고 하시며, 자신의 권위와 신분을 인정하면서도 일부러 그 권위를 내려놓고 섬김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3) 제자들의 충격: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예수님이 수건을 두르시고 물을 대야에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자,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요 13:6) 하며 강하게 반응합니다. 이는 단지 겸손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 사회적 상식으로는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는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종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 전체의 질서를 흔드는 행위였고, 따라서 제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 씻김은 단순한 친절이나 겸손의 행위가 아니라, 당시 사회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권력의 전복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위계 속에서 ‘가장 낮은 자’의 자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 즉 "섬김을 위해 오신 메시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행동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면, 발을 씻겨주는 행위는 단순한 퍼포먼스나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권위가 어떻게 세상의 방식과 다르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영적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자들에게 섬김을 가르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해 직접 몸소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기꺼이 하시면서 본을 보여 주실 만큼 섬김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동일합니다. 누구나 다 섬기는 것 보다 지배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더 많은 섬김을 받기 위해, 힘과 명예와 권력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교회에서도 우리는 자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치 직분을 명예나 권력으로 이해합니다.
직분을 통해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직분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주어진 제도입니다.
장로님이든 권사님이든, 집사님이든 목회자이든, 지배하거나 군림하기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섬기는 것이 섬김을 받는 것 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왜 섬김이 더 위대할까?
섬김은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다고 말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사실 말로만 “사랑한다”라고 하면 잘 와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친절한 말 한마디, 따뜻한 밥 한 끼, 진심 어린 기도, 희생적인 돌봄으로 나를 섬길 때,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아,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느낍니다:
섬김은 단순히 돕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통로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내가 너희를 섬기러 왔다”고 하시며,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 모습 속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됩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섬길 때, 그 사람은 단순한 도움 이상을 받습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위로와 확신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기 보다 섬기는 자가 되셔서 하나님께 인정 받는 복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2. 영광이 아니라 고난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청에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여기서 ‘잔’과 ‘세례’는 모두 고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고통을 ‘잔’으로 비유했습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로 향하실 것이며, 그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1) 마가는 예수님의 고난 예고를 세 번 반복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8:31, 9:31, 10:33-34).
하지만 매번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반응을 보입니다.
→ 예수님은 고난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영광과 권력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마가는 예수님의 고난 가르침과 제자들의 오해를 대조적으로 배치합니다
마가는 이 반복된 패턴을 통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 제자들은 세속적인 ‘영광의 길’을 기대하고,
- 예수님은 ‘고난을 통한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가는 고난 예고 뒤에 제자들의 오해 장면을 배치하면서, 그에 대한 예수님의 교정 교육을 넣습니다.
특히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세 번째 고난 예고 직후, 예수님께서 "섬김"의 의미를 직접 보여주는 가르침(10:45)을 주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3) 발 씻김 장면과 같은 ‘섬김’의 메시지는 십자가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제자도를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마가는 구조적으로 예수님의 고난 예고와, 제자들의 오해, 그리고 참된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함께 엮어 배치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마가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너희는 오해하지 말라.
진짜 제자는 권력을 쫓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섬기는 자다.
그 길 끝에 진정한 영광이 있다.”
고난은 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복음이 단지 말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서 역사하는 능력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평탄할 때는 우리가 믿는 복음의 능력이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때에는 복음이 정말 능력 있는 소식이라는 사실이 ‘삶으로’ 증명됩니다.
-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모습에서,
- 절망 중에도 여전히 소망을 붙잡는 믿음에서,
- 미움 대신 용서를 선택하고, 절망 대신 감사하는 우리의 태도 속에서
사람들은 “복음은 진짜구나!”라고 느낍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10)
즉, 고난 중에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복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수치와 고통의 상징으로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그 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다시 한번 세상에 증거됩니다.
3. 지배가 아니라 낮아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주관하며 고관들이 권세를
부리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은 폭력과 권위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니.”
문자적으로 보면 이 표현은 강한 반대 표현으로, 기존 질서의 전복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리더십 모델을 제시하십니다. 종이 되는 것, 섬기는 자가 되는 것, 낮아지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권력 구조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신 것은 바로 그 낮아짐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낮아짐은 자존감의 손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방식으로 다시 높임을 받는 과정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먼저 낮아지는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낮아짐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자리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될 때,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되며,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인생의 바닥을 경험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손을 붙잡게 된다는 뜻입니다.
평소에는 내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 능력과 계획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어느 순간, 아무리 애써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구나. 오직 주님밖에 없구나."
그 절망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가장 선명하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볼 때,
그분은 단지 멀리서 바라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시며,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길을 모세도, 바울도 걸었습니다.
- 모세는 왕궁에서 40년을 살며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그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 바울은 자기가 가진 지식과 열심으로 의롭다고 여겼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었을 때, 예수님을 만나고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 주님은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 주님은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 안에 있는 참된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나 위대해지길 원합니다.
위대한 사람? 성공한 사람,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왕국을 세우실 때, 그 옆에—우편과 좌편에—앉고 싶었습니다. 이는 그들 안에 권력의 핵심에 참여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세상의 위대함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이 완전히 다르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낮아짐, 섬김, 고난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부어주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실 때 우리는 점점 그분의 길을 걷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사랑과 온유, 오래 참음, 자비—는 모두 낮아짐과 섬김의 자리에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둘째,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이 길을 함께 걸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어렵지만, 함께라면 견딜 수 있습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기도하며, 섬김의 모범을 나누는 가운데, 이 길은 덜 외롭고 덜 두려운 길이 됩니다.
셋째, 우리는 작은 실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거창한 고난이나 위대한 헌신이 아니라, 오늘 한 사람을 이해해 주는 것, 말없이 허드렛일을 감당하는 것,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작은 섬김들이 쌓여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삶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새로운 도덕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섬기셨고, 낮아지셨고, 고난을 감당하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이 길을 따르라.”
우리는 왜 낮아지고, 섬기고 고난받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것이 예수님이 사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자리이고, 예수님의 임재가 가장 가까운 자리이며, 성령께서 가장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낮아짐은 패배가 아닙니다.
섬김은 수치가 아닙니다.
고난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 자리야말로 예수님이 계신 자리이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그 길은 어렵지만, 예수님이 먼저 가셨기에 우리도 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외롭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도우시기에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고통스럽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이 그 끝에 있기에 소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복음의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위대함을 향한 우리의 갈망이 섬김으로, 낮아짐으로, 고난의 동행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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